제 첫 판타지 소설은 도서관서 빌린 ‘아린이야기’였습니다. 이세계에 떨어진 여자 주인공이 드래곤으로 환생하여 여러 일을 겪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지금 보면 유치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첫 판타지 소설을 접한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드래곤 남매’라는 대여점에서 빌린 판타지 소설을 읽다가 내용이 학생이 읽기에는 야하다고 판단한 부모님께 판타지 소설을 금지당한 이야기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눈물을 마시는 새’를 수업시간이나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던 추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PC통신 시대에서 시작해 대여점, 인터넷 소설, 웹소설까지 이어지는 시대를 풍미한 판타지 소설과 웹소설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1. PC 통신 시대 판타지 소설
PC통신 시대는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의 태동기로, 다양한 소설이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 초기 인터넷 공간에서 연재되었습니다.
PC통신 시대에 연재된 소설들을 통해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은 D&D룰과 톨킨의 세계관을 한국식 판타지에 접목시키고, 다양한 장르의 판타지 소설과 웹소설을 연재하고 출판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2개를 선정하였습니다.
드래곤 라자

드래곤 라자는 ‘이영도’ 작가님이 처음 PC통신에 연재한 작품으로, 유명한 네크로맨서(밤에 사람들을 잠 못 들게 만들고 연재된 소설을 읽게 만들어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었다고 해서 생긴 별명)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판타지 소설로 작품성은 말할 것도 없지요. 대한민국 판타지의 포문을 연 소설이라고 생각해 가장 먼저 소개드립니다.
주인공의 초장이라는 특이한 직업과, 드래곤과 관련된 마법적이고 신비한 이야기, 등장인물들의 유쾌한 이야기가 드래곤 라자의 매력입니다. 다만, 작가의 주제의식이 판타지 소설 치고는 다소 깊이 있어 어린 시절에는 가볍게 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서야 곱씹으며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퇴마록

퇴마록은 PC통신 연재로 시작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고 1000만 부 이상 팔리며 대한민국 미스터리, 판타지 소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1990년대 당시, 판타지 소설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구성, 귀신과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는 소재로 퇴마라는 한국에서 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풀어내며 대한민국 장르문학, 통속소설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2. 대여점 시대 초기 판타지 소설
대여점 시대는 만화책방에서 시작되어 비디오와 판타지 소설까지 추가로 들여오며 PC통신 시대에 폭발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작가들이 판타지 작품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독자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혹자는 대여점 시대가 작가들을 책 찍어내는 공장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많은 보석 같은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던 시기였으며 웹소설 시대로 이어져 갈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크메이지

대여점 시대에 가장 먼저 소개해드릴 작품은 ‘다크메이지’입니다.
김정률 작가님의 작품으로, 주인공이 악의 세력 측이 되어(언데드, 다크 메이지) 자신의 목표를 향해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했습니다. ‘극한으로 단련된 저서클 마법으로 고서클을 이긴다’라는 클리셰도 이 작품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아직도 1서클 매직 미사일로 적들을 이기고, 극한으로 압축한 파이어볼로 헬 파이어를 압도하는게 기억나네요. 지금은 흔해빠진 클리셰지만 이때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마나 연공법’을 통한 신체 강화와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 개념을 처음 잡아준 작품으로, 김정률 팬카페에 가입해 소식을 챙길 정도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한물 간 작품이지만, 저에게 판타지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 소중한 작품입니다.
묵향

처음에는 ‘무협’이라는 세계관에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신조협려나 의천도룡기가 재미있다고들 했지만, 손이 가지 않았죠. 그런 저를 무협의 세계로 끌어당긴 작품이 ‘묵향’입니다. 마교에서 키워진 살수인 주인공 묵향이 자객으로 목표를 암살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암살을 통해 어렴풋이 이해하는 ‘무(武)’와 ‘협(俠)’. 그리고 초절정고수도 맘을 편히 놓을 수 없는 비정한 무림(武林)의 세계
이를 통해 무협 세계의 매력을 느끼고 무협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묵향은 2부에서 ‘무림에서 판타지 세계로 넘어간 무인이 겪는 모험’이라는 퓨전 판타지의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퓨전 판타지로 인상 깊었습니다.
비뢰도

저에게 ‘신무협’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비뢰도’입니다. 무협을 중장년층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던 저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와 유머로 쉽게 다가왔습니다.
‘천무학관’을 배경으로 한 무협 학원물과, 정체를 숨기고(힘을 숨기거나 강제적으로 약해진 뒤) 무공을 가르치는 클리셰는 현재는 많이 사용되어 식상해졌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처음 정립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서 비뢰도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다만,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큰 단점입니다.
3. 대여점 시대 후기
대여점 시대 후기는 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 출판 판타지 소설의 황혼기였습니다. 스마트 폰이 나오고 가볍게 1화 분량으로 소비하는 웹소설 플랫폼이 나오기 전, 그나마 1권 분량으로 소비되는게 가능했던 종이책으로서의 판타지 소설이 소비되는 마지막 시기이기도 합니다.
달빛 조각사

대여점 시대의 소설 하면 역시 ‘게임 판타지 소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직접 하는 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 판타지 소설들, 자신의 상상력으로 직접 게임을 만들고 창조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주인공들을 보는 재미일까요? 게다가 알기 쉽게 ‘퀘스트’와 ‘레벨업’, ‘상태창’까지. 이 모든 게임판타지의 문법을 잘 사용한 가장 성공한 게임 판타지 소설이 저는 ‘달빛 조각사’ 라고 생각합니다.
히든 직업인 달빛 조각사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게임 세계의 모험들, 실제 게임이라면 개발이 되지 않아 막혀 업데이트를 기다려야 하지만 게임 소설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언제든 광활한 세계를 여행하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실제 게임에서는 예산 문제 때문에 구현하지도 못할 대규모 전쟁이나 가상현실까지. 이 모든 장점을 글로 표현하고 철처하게 흥미 위주로 재밌게 쓰여지고 집대성하여 재밌게 만들어 낸 게임 판타지 소설이 ‘달빛 조각사’ 입니다.
더 세컨드

앞서 너무 좋은 소설들만을 소개 해 드렸지만 대여점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소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웹소설 시대로 치자면 흥행에 실패해 ‘유료화’도 못 갔을 소설들이 대여점이라는 무조건 사주는 시장을 등에 업고 나오기만 하면 팔리니, 무조건 판타지 소설을 찍어내 ‘불쏘시개’라고 평가받던 하던 소설들도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안 좋은 평가를 받는 소설들 중 상당수는 ‘이고깽’이라 불리는 ‘이세계 고교 깽판물’. 소위 고등학생이 이세계에 가 막대한 힘을 받고 드래곤과 친구가 되거나, 드래곤이 되어버리거나, 막대한 힘을 휘두르는 유치한 먼치킨 장르의 판타지 소설이었습니다. 현대인 천재론과 결합해 가볍게 보기 좋은 소설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워낙 인기를 끌다 보니 잘 쓴 이고깽 소설도 많았지만 그만큼 안 좋은 소설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고깽 소설의 안티체제로 나온 소설이 ‘더 세컨드’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양산형 판타지 소설 주인공의 대척점인 주인공의 이야기로, 그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클리셰를 파괴한다.’ 는 이야기를 저에게 선사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클리셰를 파괴하더라도 마지막에 반전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지, 이렇게 이야기의 대들보로 사용한 적은 처음이라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매력적인 인물과 이야기, (다시보면) 유치하지만 감동을 주는 여운까지. 평소에는 악역으로만 나왔던 정통 귀족의 자부심 넘치는 남자다운 이야기에 가슴 떨리며 읽었던 이야기를 끝으로 저의 대여점 시대 마지막 시대를 풍미한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4. 웹소설 시대 초기
대여점 시장과 스마트 폰이 아닌 컴퓨터로 보는 웹소설이 공존하여 대여점 후기랑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이 시기 다양한 웹소설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중 유행했던건 탑 등반물과 레이드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 레이드물(헌터물)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 뒤로 빼두고 지금 이야기할 작품은 탑 등반물 입니다.
환생좌

소설 연재 사이트 조아라에서 시작된 ‘메모라이즈’가 탑 등반물의 시초라면, 유행을 시키며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환생좌 라고 생각합니다.
튜토리얼의 요정 클리셰를 아시나요? 갑작스래 소환된 등장인물들에게 규칙을 설명해주던 요정이 반발하는 조연을 머리를 터트리며 상황의 심각성을, 비현실적인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 쓰는 탑 등반물 초반의 유명한 클리셰입니다.
지금으로선 웃음벨 취급을 받는 튜토리얼의 요정들이지만 이 작품이 나왔을 때의 ‘관리자’들은 보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했습니다.
올라갈 때 마다 새로운 무대를 공략해야 한다는 ‘탑 등반.’ 회귀를 통한 미래 지식과 주인공만의 개성있는 능력, 인간관계의 사건과 갈등을 풀어나가며 진행되는 이야기 방식으로 초중반까지는 매우 재미있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탑 등반물의 전형적인 단점은 어김없이 파워 인플레가 되기에 중후반 부터는 재미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소설 또한 비슷하구요.
환생좌는 ‘탑 등반물’ 판타지 소설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회귀도 13번이면 지랄맞다 등 앞으로 있을 수작 탑 등반물 웹소설들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5. 웹소설 시대 중기
웹소설 시대 초기와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초기에 있던 작품들이 전부 완결되기도 전에 나와버림) 그래도 시대, 패러다임 상으로는 중기로 분류하였습니다.
멸망 이후의 세계

‘회귀’라는 소재는 매력적입니다. 대여점 시대의 ‘이고깽’이 이세계 ‘환생’의 대표적인 소재였다면 ‘탑 등반물’의 대표적인 소재는 ‘회귀’를 통한 지식 선점과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 이후의 세계는 그런 클리셰를 부서트리고 작품, 주인공에 대한 고찰과 게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웹소설을 통해 만들어 낸 수작 웹소설입니다. 어려운 내용들을 소설 속에 녹여냈지만 거부감 없이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점 또한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바바리안 퀘스트

‘야만인 유릭’의 문명과 비문명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흥미롭게 그린 소설입니다. 로우 파워 판타지 세계관으로 소드마스터나 오러, 마법도 없지만 정말 매력적인 판타지 소설입니다.
애초에 바바리안(야만인) 전사는 디아블로 게임의 메인 주인공 캐릭터로 유명했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바리안 퀘스트를 통해 큰 인기를 끌고 ‘게임 속 전사가 되었다’, ‘게임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 등 걸출한 힘으로 마법이나 신비까지 두드려패는 매력적인 야만인 캐릭터가 나오게 만든 새로운 종류의 웹소설을 만든 판타지 웹소설 추천 작품입니다.
괴담 동아리

앞서 PC통신 시대에 유행했던 미스테리, 공포, 퇴마와 같은 소재는 ‘괴담 동아리’이전까지 크게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있더라도 어반 판타지 소설로 하위 장르, 비슷한 장르로서만 존속했습니다.
하지만 괴담 동아리는 웹소설 시대의 장점, 게임 시스템, 회귀, 흥미로운 서사와 클리셰 등을 자유롭게 버무려 하나의 소설로 탄생시켰습니다. 이로서 다시 대한민국에는 공포, 미스테리, 퇴마와 비슷한 ‘괴담’이라는 유행 장르를 탄생시켜 다른 작품에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사 신공

마지막으로 소개 해 드릴 작품은 우리나라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입되어 들어오고, 세계화 시대에 번역되어 읽혀 장르의 변혁과 발전을 끌어올려 시대를 풍미한 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학사 신공은 ‘선협’이라는 세계관을 소개해준 작품입니다. 선협은 중국식 무협으로 신선이 되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과정에는 인의도, 협도 없을 수 있으며 자신의 발전과 영달만이 중요할 수도 있는 중국식 소설의 특징이 있습니다. 보다 세분화된 신선으로의 수행 방법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독특한 세계관과 수행 방식(영단, 무공, 요괴 등)이 매력적이며 선협 붐을 불게 만들어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정말 좋은 선협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입니다.
위에서 말한 작품들이 제가 생각한 시대를 풍미한 판타지 소설, 웹소설 추천 작품들입니다. 웹소설의 변화는 아직까지도 너무 빨라서 수 많은 작품들이 등장하고 다른 여러 작품들에게 영향을 주며 한 시대를 대표하려고 노력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 또한 각자의 시대를 풍미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